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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패한 일을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이 훨씬 더 바보같은 짓이다.
    - 탈무드



[중앙일보] 대통령 직무정지 40일째. 국회의 탄핵안 통과로 청와대 집무실 출근을 중지한 노무현 대통령의 봄은 길기만 하다.

그는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 17대 총선이 있었다.

정계의 지각변동이 있었다.

盧대통령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궁금해하는 독자들의 문의가 신문사에 이어졌다.

이에 盧대통령의 칩거생활을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이 보내온 육필원고를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 "언제부터인지 대통령의 화제에는 봄과 자연, 생명 인간과 같은 낱말들이 자주 등장했다" "어, 저건 꿩이잖아? 꿩이 이곳에 다 오네."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기라도 한 듯, 대통령은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 마당이 보이는 창문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탄핵안이 가결되고 나서 2주일이 지난 3월 25일 오후, 관저 응접실에서의 일이었다.

"저것 보게! 진짜 꿩이야. 어떻게 여기까지 꿩이 왔을까?" 물끄러미 꿩을 바라보던 대통령은 불현듯 생각이 난 듯 관저 부속실로 통하는 인터폰을 눌렀다.

"마당에 꿩이 왔어.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먹거리를 만들어 놓아두면 좋겠는데." 색다른 날짐승의 출현이 담담하기만 하던 대통령의 표정을 일순간에 바꾸어놓았다.

그 표정 속에는 유폐 아닌 유폐, 연금 아닌 연금으로 갇혀버린 대통령의 안타까운 봄날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꿩이 날아가버렸는지 대통령은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와 참모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내 섭섭함을 어찌할 수는 없었나보다.

대통령은 이야기 도중에도 계속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갇힌 대통령의 잃어버린 봄을 실감하고 있었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3월 12일.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이었다.

이미 법적으로 직무정지 상태가 된 대통령이 본관 앞 정원에 착륙한 헬기에서 내렸다.

본관 앞에서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던 100여명의 직원이 헬기 앞으로 걸어와 양 옆으로 길게 도열했다.

대통령은 비서실장의 영접을 받았다.

헬기에서 내린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자 직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소리없이 울음을 삼켰다.

이날 정오 무렵, 탄핵안 가결을 처음 보고받았던 창원의 ㈜로템 공장에서도, 그리고 봄기운이 완연했던 진해의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도 의연함과 꿋꿋함을 잃지 않았던 대통령이었다.

아니 대통령은 오히려 더 당당한 목소리로 생산현장의 직원들을 격려하고 웃음으로 그들과 작별했으며 더 힘찬 목소리로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내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었다.

그런 대통령이 금방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본관 앞 계단을 올라선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더 걱정입니다."

대통령은 자신을 위로하기보다는 직원들을 위로했다.

대통령이 위로해야 할 대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어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서도 그랬고 수석보좌관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그랬다.

사상 초유의 직무정지 대통령이긴 했지만, 내각과 참모들이 동요 없이 국정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은 정지될 수 없는 대통령의 직무였다.

대통령은 말했다.

"이것은 변화를 위한 진통입니다.

좌절하지 않고 또 이 고통을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국민도 혼란스럽고 고통을 겪고 있고, 나 또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을 헛되이 해서는 안됩니다."

다음날. 관저에서 만난 대통령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격전의 선거를 치러놓고도 막상 개표가 시작되기 전에는 태연히 한잠을 자곤 하던 특유의 낙천주의도 한풀 꺾였던 것일까? 대통령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어딘가 어둡고 초췌한 구석이 있었다.

대통령의 상념은 결코 편안할 수 없었던 이 정치역정이 시작되던 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다.

"부산 초량동이 내 정치의 출발점이죠. 초량시장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상념의 끝에서 대통령은 이번 대통령선거 당시 찬조연설을 해주었던 자갈치 아줌마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그보다 더한 미안함을 표시했다.

"자갈치 아줌마, 정말 그렇게 애써서 해주셨는데… 제가 이렇게 되었군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날 대통령은 방콕에서 급거 귀국한 문재인 전 수석과 오찬을 함께했다.

탄핵 심판 대리인단 구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인 듯이 보였지만, 대통령이나 문재인 전 수석이나 식사 도중에는 아무도 그 문제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오찬이 끝나고 배웅하는 자리에서 한 마디를 하는 것으로 대통령은 모든 주문을 대신했다.

"그렇게 쉬게 해주려고 해도, 결국은 쉬지 못하게 하는군요."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연일 '촛불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로부터도 격리돼 있었다.

대통령은 촛불시위가 질서정연한 가운데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로 진행된다는 데에 다소 놀라는 표정이었다.

대통령은 지난해에 한번 읽었던 '칼의 노래'를 다시 집어들었다.

독서와 산책, 그리고 주말 등산. 그것이 이제 대통령의 몇 안 되는 벗이 되었다.

그 와중에서 대통령은 비서실 참모들을 접할 때마다 '고건 대행 체제가 순항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3월 21일 일요일. 대통령은 직무정지 열흘 만에 카메라 앞에 섰다.

아무리 직무는 정지돼 있어도 대통령의 모습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던 것. 대통령은 기꺼이 촬영에 응했고, 참모들이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 대통령은 탄핵 심판 대리인단과 저녁을 함께했다.

그 자신이 변호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의뢰인의 신분으로 정식으로 또 정중하게 대리인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헌법재판소 출석 문제는 대리인단의 결정에 일임했다.

그렇게 대통령은 하나둘씩 자신이 결정해야 할 문제들의 가닥을 잡아나갔다.

그러나 재신임 문제와 입당 문제에 이르면 대통령은 말을 멈추고 곤혹스러워 했다.

"대통령은 드골, 링컨을 이야기했다.

성공한 모델이든 실패한 모델이든 지도자들의 삶은 시사를 주고 있는 듯했다" '봄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줄 알았더니, 땅에서 솟아오르더라!' 3월의 끄트머리, 대통령은 어느 오찬석상에서 자신을 찾아온 새봄을 이렇게 표현했다.

언제부터인지 대통령의 화제에는 봄과 자연, 생명, 인간과 같은 낱말들이 자주 등장했다.

그리고 책. 대통령은 드골을 이야기했고, 링컨을 이야기했고, 또 충무공 이순신을 이야기했다.

성공한 모델이든 실패한 모델이든 정치지도자들의 삶은 대통령에게 여러가지 시사를 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달이 바뀌어 4월. 식목일 행사에 참여해달라는 비서실의 요청에 대통령은 기꺼이 응했다.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낸 대통령 내외를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와 잣나무 몇 그루를 심은 다음, 그야말로 오랜만에 마이크를 잡았다.

대통령은 농담으로 인사를 시작했다.

"그냥 여러분 보니까 참 좋습니다."

최근 보았던 대통령의 표정 가운데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특유의 멋쩍은 웃음도 있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사람은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살아야 하는 법. 그날의 자리는 대통령도 그 예외가 아님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현충사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 가보고 싶어요. 그런 훌륭한 분하고 우리 처지를 비길 바는 아니지만 사람이 왜 그럴수록 우리가 더 감동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보고 싶은데 못 갑니다.

그러니까 이게 유폐생활이죠. 유폐생활인데, 실감이 납니다."

청와대의 시계는 3월 12일에 멈춰서 버린 것일까? 대통령에게나 청와대 직원들에게나 시간은 그렇게 천천히 더디게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 직무정지 한달째가 된 4월 11일,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북악산에 올랐다.

이날 대통령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이 봄의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이번 총선이 끝나면 통합과 대화의 정치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제 일생의 목표는 국민통합입니다'. 대통령은 탄핵 기간 중 유달리 이 말을 많이 했다.

어쩌면 대통령은 정치를 시작했던 1988년 이래 일관되게 추구해 왔던 통합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마지막 고비를 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목표를 위해 대통령은 수없이 엎어지고 좌절하고 꺾이면서도 원칙을 잃지 않고 일관된 길을 걸어왔었다.

스스로 지역주의의 기득권을 저버리면서 바람 부는 광야로 나섰었다.

대통령은 지금 그 광야에서 마지막으로 험한 바람을 맞으면서 통합의 언덕을 향해 오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탄핵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되었던 날 저녁, 대통령은 수석보좌관들과의 만찬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정말, 무슨 운명이 이렇게 험하죠? 몇 걸음 가다가는 엎어지고…. 또 일어서서 몇 걸음 가는가 싶으면 다시 엎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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