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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6 21:08
바다에 버리고 오다 [기형도]
조회 수 5129 댓글 0
![](/zbxe/modules/editor/skins/xpresseditor//files/attach/images/1199/393/001/sea_8997.jpg)
나는 기형도의 시가 좋다.
우연히 '기형도 전집'을 읽게 되었었는데, 아무생각 없이 책을 들었지만 그때 받았던 신선한 느낌은 잊혀지질 않는다.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나, 화려하면서도 유치하지 않은 표현법은 정말 뛰어난 것 같다. 또한 짧고 화려하게 작품활동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작가라면 충분한 매력이 있는 것일테니까.
그의 시 한편.
바다에 버리고 오다 [기형도]
1.
도망치듯 바다로 달렸다
그 바다, 구석진 바위에 앉아
울고 싶어서 술을 마셨다
그냥은 울기가 민망해서 술기운을 빌려 운다
울 수 있을 만큼만 술을 마신다.
그러면 바다는 내 엄살이 징그럽다고 덤벼들었다
노을이 질 무렵, 파도가 한 웅큼의 피를 쏟아내었다
바다는 새벽을 잉태하기 위하여 날마다 하혈한다
일상의 저음부를 두드리던 가벼운 고통도
내 존재를 넘어뜨릴 듯 버거운 것이었고
한 옥타브만 올라가도 금새 삐그덕거리는 우리의 화음은
합의되지 못한 쓸쓸함,
그래 가끔은 타협할 필요도 없이 해결 되기도 했지만
나와 함께 아파 할 아무도 없다면 어떠랴
징징대는 감정을 달래느라 늘 신경은 하이소프라노로 울고
끝내는 당도하지 못할 너라는 낯선 항구,
파도가 쓸고 가버린 것은 빈 소주병만이 아니었을까
시작도 없는 끝, 시작만 있는 끝
늘 함부로 끝나버리기 일쑤인 기약없는 시작이었음을
2.
바다가 잠든 나를 두드렸다
이미 어두워진, 수초내음만이 살아있는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눈을 문질러도
보이지 않아서 볼 수가 없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하기로 한다
바이올린의 비명이 나를 대신하는
oblivion, 바다가 슬픔을 풀어놓는 동안
잃어버린 기억 한자락 끼어든다
망각은 내가 너를 견디는 방식
살아가는 것이 무릎 관절염 같은 시린 악몽일지라도
오늘, 단 한편의 아픈 꿈을 허락하기로 한다
오늘만 취하기로 한다
수평선 너머로 밀려가는 아득한 기억상실을 위하여
3
바다는 출산을 위하여 끙 한번 신음한다
망망대해에 부유하는 사연들과 같이 아파했던 까닭으로
바다는 새벽을 낳을 무렵, 푸르고도 투명하게 멍들어 있다
첨부파일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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