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Clouds

New Postings

  • 글쓰기가 힘들 때 나는 가끔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내 책을 읽는다. 그러면 글쓰기는 언제나 어려웠고 가끔은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2008.01.26 11:26

식민지의 국어시간

조회 수 9318 댓글 0
식민지의 국어시간
.             -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가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한글,
배우기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 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않아 있는 일본어 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않아 있는 영어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서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

------------------------------------------------

그래... 영어로 수업 잘 해봐라 이것들아.

[ 관련 글 ]
TAG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7 김창옥 특강 '통'하였느냐 드립들 2016.09.23 4465
26 영화 '아부의 왕' 중에서 2013.11.19 4803
25 11회 광명시 전국신인문학상 시상식 file 2013.02.01 5361
24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 50문 50답 2003.03.21 7236
23 B형들을 위한 시 2004.09.10 7666
22 이번시험은.. ㅜ_ㅜ 2003.06.24 8339
21 이풀잎 프롤로그 file 2004.10.24 8699
20 [自] 합창(97. 3) 2003.01.03 8710
19 눈 물 / 김경미 file 2004.08.16 8721
18 [自] 할매의 나이테(97) 2003.01.03 8753
17 가장 먼 거리 file 2004.11.08 8990
» 식민지의 국어시간 2008.01.26 9318
15 [시] 해낭(奚囊) 2010.12.10 9592
14 정말이지 황당한 일 2008.09.24 9665
Board Pagination ‹ Prev 1 2 Next ›
/ 2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