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 뉴스에서 연재중인 노무현 인터뷰 긁어 옵니다.
나는 왜 노무현 대통령을 8시간 만났나?
[오연호 리포트 : 인물연구 노무현①] 분노와 승부의 뿌리를 찾아서
지난달,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두 차례에 걸쳐 8시간 정도였다. 한 번(9월 2일)은 청와대 관저에서였고, 또 한 번(9월 16일)은 청와대 상춘재였다. 모두 일요일이었다. '인물연구 노무현'을 위해서였다.
대통령 노무현을 인물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집권 초기의 대북송금 특검, 이라크파병 때부터 그랬다. '전통적 노무현 지지자'들의 이탈 혹은 분화를 보면서 그에 대처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방식을 연구하고 싶었다.
탄핵이 있었고, 전통적 노무현 지지자들은 다시 그를 구해냈다. 그러나 노무현이라는 이름에서 감동을 느낀다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거의 5년이 다 지나고, 다시 대선의 해를 맞았다. '옛 노무현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는 감동거부증세까지 보인다. '2002년에 노무현에 감동했는데, 대통령 뽑아놨더니 별 거 없더라, 2007대선에서는 다신 감동하지 않겠다'.
어떤 대상에 대해 애증이 장기화되면 두 갈래로 정리된다. 하나는 무관심과 포기다. 다른 하나는 본격 연구다. 후자는 미련이 남아있는 경우다. 쏟았던 애정이 하룻밤의 축제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픈 경우다. 또 다른 감동을 준비하고픈 경우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지지율이 30%를 밑도는 때가 많은 대통령.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은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가? 속시원히 묻고 싶었다. 대통령할 준비 안됐었습니까? 왜 그 정도밖에 못하십니까? 언론의 비판을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왜 좀 더 치밀하게 못하십니까?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꼭 대통령 노무현을 인물연구해야겠다고 작정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너무 독특했다. 보수언론은 물론, 진보언론으로부터도 비판당하는 대통령이 '마지막 1년을 보내는 방식'이.
내가 그를 본격적으로 인물연구 하고 싶었던 것은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언론의 희화화(戱畵化)가 극에 달했던 지난 6월초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6월 2일 참여정부평가포럼(참평포럼) 창립식에서 무려 4시간에 걸친 작심 연설을 했다. 조중동을 포함한 주요 신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광신도 앞의 교주' 정도로 묘사했다. 우스꽝스럽게 잡힌 사진들을 곁들였다. 방송들도 노 대통령의 자극적인, '야한' 말들을 중심으로 1분 내외 길이의 몇 꼭지를 내보냈다.
언론은, 사회(현실)의 거울이 아니라 '편집된 거울'이다. 나는 그날의 4시간 연설의 전문을 찾아 읽고 싶었다. 우리가 2002년에 뽑은 대통령은 정말 그렇게 언론의 놀림감밖에 안되는 사람이었을까? 임기를 1년도 채 남겨놓지 않은 대통령은 왜 그렇게 쏟아내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말을 많이 한다고, 거칠게 한다고 지적 받아온 대통령은, 그런 지적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왜 또 그랬을까? 그날 연설의 첫 대목의 제목은 "참여정부는 실패했는가, 무능한 정부인가"였다. 왜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자신에 대한 평가를 그토록 소중히 여길까?
전문을 읽어보려 했더니 A4용지 30장이었다. 한 번 읽는데 3시간이 걸렸다. 그곳엔, 언론이 뽑아낸 자극적인 말들은 양념이었을뿐, 그것들과는 다른 진지한 세계가 있었다. 민주주의론, 지도자론, 시민사회론이 있었다.
연설문의 후반부를 읽을 때 나는 느꼈다. 앞으로 대한민국 정치는 노무현의 말, 노무현의 실험, 노무현의 사상에 10년 이상 더 영향을 받겠구나! 그것이 적든 크든.
그리고 한편으로 이해가 됐다. 왜 그가 30%를 밑도는 지지율에, 임기 말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큰소리를 치고,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는지. 그가 왜 임기 말에 ‘정리’가 아니라 새롭게 분노하고, 새롭게 대결하고, 새로운 승부를 걸고 있는지.
지난 8월 16일 나는 청와대에 공식적으로 '대통령 노무현 인물연구를 위한 인터뷰'를 신청했다. 특별히 부탁한 건 이 한가지였다. 양쪽 모두 '인터뷰 준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속마음을 주고 받았으면 좋겠다.
▲ 노무현 대통령에게 생일축하 꽃다발을 건네는 오연호 대표기자.
ⓒ 청와대 제공 노무현대통령
보름 후인 9월 2일 일요일 오전 10시 청와대 관저에서 첫 번째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집무실이 아닌 거처인 관저에서 언론인을 만나 인터뷰한 것은 처음이라고 동석한 비서진이 말했다. 나는 선물로 <오마이뉴스>에서 최근 펴낸 단행본 <경부운하, 축복일까 재앙일까>를 준비했다. 속표지에 이렇게 적어 대통령에게 건넸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 모든 시민은 지도자다'.
-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 문장은 <오마이뉴스>의 모토이고, 뒷 문장은 노대통령의 참평포럼 연설문의 결론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본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높은 수준이 돼야 우리가 이상적인 사회에 한 발 더 가까이 가겠지요."
오전 10시에 시작된 대화는, 관저에서의 점심식사로까지 이어졌고, 관저 옆 야산의 대통령 휴식처에서도 계속됐다. 오후 1시 30분경 휴식처에서 내려오면서 작별인사를 나누려했더니 대통령은 "좀 더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다시 관저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날의 대화는 오후 3시 30분에야 끝났다.
두 번째 인터뷰는 9월 16일 일요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노 대통령의 61회 생신이었다. 언론들이 일제히 "변양균, 정윤재씨 사건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쓸쓸하고 우울한 생일을 보내게 됐다"고 쓰던 그날이었다. 꽃다발을 준비해 전했다. 이날은 오후 3시부터 5시 30분까지 이어졌다.
노 대통령과의 두 차례 인터뷰는 <오마이뉴스>에서 이한기 뉴스게릴라본부장(편집국장), 황방열 기자가 함께 했다. 청와대측에서는 양정철 홍보기획 비서관, 김종민 국정홍보 비서관, 김경수 연설기획 비서관, 윤태영 전 대변인 등이 배석했다.
서로 특별한 준비 없이 만나서였을까? 총 8시간에 걸친 대화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솔직했다.
"지지자를 만나면 '나 때문에 힘들었지요'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지자들에게 제일 미안한 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나 지지한 것 때문에 힘들게 한 것이지요."
노 대통령은 "말씨와 자세에서 대통령 할 준비가 안돼 있었다"고도 했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시도에 대해서는 "나의 자만심이 만들어낸 오류"라면서 "아주 뼈아프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다음 대통령은 좀 부드러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8시간 대화에서 얻은 소득은 그가 왜 임기말인데도, 변양균-신정아-정윤재 사건에도 불구하고 기가 죽지 않고 짱짱하게 자기 할 말을,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파악한 것이었다.
대통령은 말했다. "참여정부의 권위주의 해체와 권력분산은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검찰은 장악할래야 장악도 안되지만 일부러 검찰신세를 절대 지지 않았다. 임기 끝내고 살아서 내 발로 걸어나가고 싶어서였다." 이런 말도 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막판에 언론에 타살당했다, 나는 송장이 안되고 떳떳이 걸어나가겠다. 자기방어에 대한 준비가 돼 있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떳떳이 살아 걸어나갈 준비의 핵심이 공부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권력론, 민주주의론, 지도자론, 시민사회론에 대한 것이었다. 그 공부를 바탕으로, 자신의 체험과 연결해 "정치학 교과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퇴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노무현 저(著) 정치학개론'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왜 그가 참평포럼의 4시간 연설 후반부에 민주주의론을 설파했는지 그제서야 연결이 됐다.
대통령은 말했다.
"정치권력은 하나의 권력일 뿐이지요. 진정한 의미의 권력은 시민사회에서 나옵니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권력에서는 퇴임을 하고 있지만 진정한 권력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대통령을 퇴임하는 나는 권력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권력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민사회 속으로."
그런 노무현 대통령이 만약 2007 대선을 주제로 정치학 특강 '권력론편'을 한다면? 아마도 이런 내용이지 않을까.
2007년 대선정국에서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과정을 밟고 있다. 대통령은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권력일뿐이다. 우리는 이미 '진정한 의미의 최고권력'인 시민사회를 갖고 있다. 대통령 노무현의 탄생은 감동과 참여로 가능했다. 당신이 만약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면 당신은 '모든 권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 의탁한 권력'을 '버린' 것이다, 새로운 권력을 선택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시민은 지도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시민 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퇴임은 마침표가 아니라 또 다른 출발선이다. 여기에 그가 임기 말에도 기죽지 않은 이유가 있다. 여기에 우리가 앞으로도 적어도 10년 간은 노무현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8시간동안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인물연구 노무현은 앞으로 <오마이뉴스>에 여러 차례에 걸쳐 연재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본격적으로, 전문적으로 인물연구 노무현을 함께 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위에서 언급한 참평포럼 연설문 전문을 미리 읽어보길 권한다. 3시간 걸린다. 3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함부로 현직 대통령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는가?
[참평포럼 전문①] "언론의 자유가 기자실에 있나?"
[참평포럼 전문②] "손학규씨가 왜 범여권인가?"
당신은 지금 2007대선에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는가? 우리가 2002년에 뽑았던 대통령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대선(대통령)이 뭐길래'에 대한 답을 같이 찾아보자. 어떤 대선 후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분들,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분들, 혹은 그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분들, 그리고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분들 모두 이 연재 기사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 힘들었지요?
노무현 지지자여서 구박받는 게 제일 미안"
[오연호 리포트 : 인물연구 노무현②] 지지자들에 대한 예의
청와대 관저는 권력 제1인자의 거처다웠다. 밥풀이 떨어지면 다시 주워먹어도 될 만한 비단같은 잔디마당이 있는, 그 넓고 높고 격조있는 대통령의 집에서 인간 노무현을 마주하고 앉으니 옛날들이 떠올랐다. 부산의 승용차 안에서, 여의도의 한 포장마차에서 그를 인터뷰하던 시절들이.
- 제가 그동안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부터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인터뷰를 몇 차례 했는데요, 기억하시나요?
"예, 기억하지요. 제일 확실하게 기억나는 게 <조선일보> 보도 관련해서…."
변호사 출신인데 소송과 관련된 기사이다 보니까, 언론과 대결해온 정치인이다 보니까 그 인터뷰를 "제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내가 <말> 기자이던 때 썼던, <주간조선>의 노무현 재산관련 보도에 대한 '반론 인터뷰' 격 기사였다.(1991년 월간 <말> 12월호에 게재된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명예싸움')
7년전 그와의 인터뷰... "차기 대통령은 지역통합적인 나"
1988년부터 기자 오연호가 정치인 노무현을 단독 인터뷰한 것은 이번을 포함해 모두 8번쯤 된다. 많은 독자들은 대표적으로 2003년 2월 23일의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 인터뷰를 기억할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이틀 전에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오마이뉴스>와 단독 인터뷰("청와대·정부 가판신문 구독금지, 정권과 언론의 유착관계 끊겠다")를 가졌다.
그러나 그간의 정치인 노무현과의 인터뷰 가운데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대통령을 꿈꾼 국회의원 출마자 노무현'을 단독 인터뷰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2000년 3월 22일 부산에서다. <오마이뉴스> 창간(2000년 2월 22일) 직후에 실린 그 기사의 제목은 노무현 "차기 대통령 선거 나갈 것"이었다. 첫 대목이 이랬다.
"노무현 의원(민주당 지도위원)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처음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노무현 의원은 3월 22일 오전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민주당 부산지역 공천자 합동 기자회견'을 마친 직후 오마이뉴스와 2시간 동안 단독 인터뷰를 갖고 "차기 대통령은 지역통합적 인물이 나와야 한다"면서 "그런 조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나라고 감히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가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고 하자 총선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다시 당시 기사를 옮긴다.
"노무현 의원은… …국회의원 당선을 위한 전략이냐, 아니면 실제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총선용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 "지역구를 부산으로 옮긴 것도 그런 큰 구상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인터뷰는 승용차(무쏘) 안에서 이뤄졌다. 부산 중구 코모도호텔에서 그의 지역구인 북구 금곡동 연락사무실을 향해가면서. 그는 "차 안이라 흔들려서 받아적기 힘들지요"라고 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이 되어보려고 했던 것일까? 그가 대통령으로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막 마친 지금 읽어보니 새롭다.
당시 노무현 의원은 "기본적으로 내가 차기에 대해 의욕을 갖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과 생산적 복지정책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지역화합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 여야를 막론하고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내 생각으로는 김근태 의원과 나 두 사람 정도"라고 말했다.
나는 그 기사를 정리하면서 이런 대목이 포함된 인터뷰 후기를 붙였다. 다시 읽어본다. 우리는 차기 대선을 이야기했다. 그가 가장 길게 뜸을 들이다 답한 것은 이 질문 때였다.
- 대통령이란 참으로 복잡한 일들을 처리해야하는 골치아픈 자리일텐데, 그런 일을 해내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노 의원은 "그게 뭘까요?"하고 되묻다가 이렇게 답했다.
"판단력…. 역사적 안목을 기르는 일입니다."
역사적 안목…. 그랬다. 그땐 덜컹거리는 승용차 안에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로부터 7년 후, 대통령 퇴임을 몇 달 앞둔 그와 청와대 관저에서 마주 앉았다.
▲ 지난 2000년 4·15총선에서 낙선한 뒤 <오마이뉴스> 기자 회원들과 인터뷰를 가졌던 노무현 후보. ⓒ 노순택 노무현
7년 전 지지댓글... "세계 경제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무엇을 먼저 물을까? 청와대 정문을 통과해 관저로 향하면서 첫 질문을 생각했을 때부터 그들을 떠올렸다. 딸기 아빠, 권희종씨, 황효식씨…, 그들이라면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에게 무엇을 가장 먼저 물을까? 그들은 7년 전의 내 기사 노무현 "차기 대통령 선거 나갈 것"에 댓글을 달았던 이들이다. 노사모가 탄생(2000년 6월)하기 몇달 전이다. 가장 최초의 '대통령(감) 노무현' 지지 네티즌들이라 할 만하다.
딸기 아빠는 "노 의원의 외로운 길 옆에는 작은 풀포기와 이름없는 들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면서 "외로워말고 주위를 둘러보세요"라고 대통령을 향한 길을 격려했다.
황효식씨는 상처와 분노에 대처하는 방식을 조언했다. "상처 받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분노하더라도 절대 증오하지 않으며 대의를 향하여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당신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불순한 방법으로 이용한다면 그만큼 정치는 더 더러워질 것입니다. 역사 앞에 민족 앞에 책임지는 정치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권희종씨는 일단 "한국 정치의 가장 큰 현안은 지역 구도를 깨는 것"이라면서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온다면 의미가 크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 덧붙일 것은…"이라면서 이렇게 물음표를 남겼다.
"하나 덧붙일 것은 정치인들이 세계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관적이라는 느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정책은 당파적 이념으로서는 생존하기 어렵게 돼 있다.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켜서 문제를 해결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씨의 국제적 안목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대단하다. 이 독자는 7년 전에 '노무현에게 다가올 FTA'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 가장 최초의, 때문에 어쩌면 가장 순수한 노무현 지지자들의 기록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정치인 노무현에게 감동과 희망을 걸었던 것은 하룻밤의 축제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누구를 내세우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까라는 정치공학적인 셈법이 아니었음을.
그들이 만들고 싶었던 것은 있다가 사라질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었다. 작은 풀포기와 이름없는 들꽃들은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럼 없는 나라를, 현실과 이상의 조화가 이뤄지는 사회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그 도구였다. 그래서일 게다.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간다고, 그의 지지도가 낮아진다고 '그들의 축제는 끝났다'고 그 누구도 함부로 이야기할 순 없지 않을까?
노무현의 시대는 갔다, 그들의 축제는 끝났는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가 낮아지면 괜히 주눅드는 사람들이 많다. 내 책임인 양. 아마도 위의 세 독자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들을 대신하여 대통령께 물어봤다.
- 저도 2002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노무현의 가치'에 대한 지지자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요. 대통령께서 생각하실 때 제가 요즘 다른 사람들한테 '나 노무현 대통령 좋아합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좀 쭈뼛쭈뼛할 것 같습니까?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내가 고향 사람들이나 동창을 가끔 청와대에 초청해 만날 때 제일 처음 하는 인사가 '나 때문에 힘들었지요'입니다. 내가 (지지자들에게) 제일 미안한 게 그 점입니다. 나하고 친하다는 이유로, 또 옛날에 나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지금 여러분이 이 자리 저 자리에서 구박받고 있는 것이, 또 대통령인 내가 구박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 상해할 것이고, 그 점이 제일 힘듭니다. 아주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중학교 동창생 이야기를 들려줬다.
"조그마한 가게를 하는 그 동창생을 여기 초청했더니 하는 말이… '네가 막 대통령 됐을 때 너랑 찍은 사진을 가게에 딱 걸어놨더니 손님들이 '와~ 니 노무현이 아나?' 해쌓고 손님도 많이 오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는데, 나중에는 (지지도가 떨어지니까 손님들이) '야, 저 치아라, 저 노무현이 뭣 때문에 걸어놨노, 치아라' 그래서 실제로 치웠대요. 계속 못 걸어놓겠더라'고."
ⓒ 청와대 제공 노무현대통령
이 예를 들면서 대통령은 허허 웃었지만 곧 담배를 꺼냈다.
"참 어렵죠, 그럴 때. 뭐 한 사람 두 사람이었겠어요? 주위에서 다 나쁘다고 하니까. 지지자라도 정말 헷갈리지 않겠어요? 아, 정말 이렇게밖에 못하냐는 생각이 들 거고…."
전통적 노무현 지지자들이 당당하게 '아직도 나는 노무현을 지지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한 것, 대통령은 그런 현상이 만들어진 것 자체에 대해 지지자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시민 의원이 <오마이뉴스>와 인터뷰(8월 22일 "'유시민 지지' 떳떳이 말 못한 유빠에 죄송")에서 "유빠들에게 나 유시민 좋아해 하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게 한 현상을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한 점과 비슷하다.
"근데 한번 물어봅시다, 내가 뭘 잘못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과있게 마쳤다. 30%를 밑돌던 지지도는 50%를 넘나들고 있다. 노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떼어냈던 그 동창생은 다시 그 사진을 붙여놓을까?
노 대통령은 말했다.
"나 때문에 구박당하는 지지자들을 만나면 내가 미안해 하면서도 마지막엔 이런 말을 해줍니다. '조금 더 가 봅시다, 조금 더 가 봅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작은 오류들은 있었지만 큰 틀에서는 제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이렇게 되물었다.
"오 대표, 근데 한번 물어봅시다. 내가 뭘 잘못했어요? 뭐가 틀렸어요?"
(* 3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연정 제안하면 한나라 당황할 줄 알았다
수류탄 던졌는데 우리 진영에서 터져버려"
[오연호 리포트 : 인물연구 ③] 대통령의 자만
노무현 대통령은 "지지자들이 나 때문에 구박받는 것이 제일 미안하다"면서 "근데 내가 뭐를 잘못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것이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의 잘못'을 말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이렇게 답했다.
- 지지자들 입장에서 보면 이렇죠. 탄핵 당해 쫓겨난 대통령을 다시 그 자리로 돌려보내고, 탄핵 당한 직후의 4·15총선에서 의회권력까지 여대야소로 만들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지지자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줬다, 그런데 그 이후에 돌아가는 것을 보면… 결국 그렇게 대통령과 당에게 열심히 좀 해보라고 밀어줬는데 결국은 반듯한 대선후보 하나 못만들어내고, 당도 없어져버릴 지경이 됐으니….
"유시민 의원이 나한테 이런 얘길 한 적이 있어요. '왜 당신이 해야 한다고 하는 거만 합니까, 우리 국민들 기분 좋은 거 좀 해 주셔야지'. 또 조기숙 교수(전 청와대 홍보수석)는 나한테 왜 국민들과 스킨십을 하지 않으냐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던 노 대통령은 자신이 잘못한 것 가운데 하나를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합의 부족을 들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난데없이 대통령이 나서서 해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 난데없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나라당과의) 연정 그 놈 들고 나와 가지고, 국민들이 ‘연정이 뭐요?’하게 만들었죠. 그건 사전에 내가 워밍업도 없이 불쑥 들고 나와버렸고…. 그 뒤에 또 안그래도 골치 아픈데 개헌까지 들고 나오고, 언론하고 지속적으로 싸우고, 한미FTA도 안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는데, 그 거 해치워버렸거든요. 골치 아픈 일을 두루두루 다 하니까 ‘저 사람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요?’ 한 거지요. 일반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정서에 와 닿지 않는 일들을 계속 꺼내니까."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덧붙였다. "그 과정에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조중동이 필두지만 나와 국민들 사이에 언론들이 적절하게 이간질을 잘 해 가지고…."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합의 부족과 조중동의 이간질이 합쳐져 그 결과가 "열심히 한 것 마저 아무 것도 안한 것처럼" 되어버렸다고 했다.
"사실은 경제에 대해서 얼마나 내가 골머리를 앓고 열심히 했습니까? 경제 하나만은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열심히 했는데, 안 했다고 하니까 또 안 한 거가 되어버리더라고요. 경포대, 뭐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고 그런 말까지 나오고 그게 확 유행을 해 버리니까, 경제를 안 한 대통령이 돼 버렸어요, 실제로는 했는데. 아주 열심히."
"보통의 경우 내 전략이 옳았다는 자만심이..."
대통령은 한편으론 그렇게 억울해 하면서도 '내탓이요'를 확실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국민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을 난데없이 들고 나온" 사례를 이야기할 때는 더욱 그랬다. 대표적인 것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시도였다.
사실 나는 노 대통령을 만나면 꼭 이 대목을 묻고 싶었다. 왜 대연정을 시도하려고 했는가는 이미 여러 차례 언론에 보도됐지만, '대연정을 하자'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이 어느 정도 참모들의 의견을 수렴했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왜냐면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 주도 대연정"을 제안한 2005년 7월 28일을 전후로 돌아가보면 대연정 시도는 전통적 노무현 지지자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나라당과 대연정 하는 꼴 보려고 우리가 그토록 눈물 흘려가면서, 탄핵 막아가면서 대통령 노무현을 만들었나? 이런 배신감을 집단적으로 갖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지지자들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었는데, 왜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시도 했을까? 무엇을 믿고?
- 대통령께서 대연정을 시도할 때 청와대의 한 참모를 만나 물어봤습니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시도는 대선 때 노무현을 찍은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지지자들을 무장해제 시킬 것이다, 왜 꼭 하려고 하느냐'고 했더니 이러더군요. '청와대 내부에서도 이론이 있는데,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이러한 큰 흐름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대통령의 직감이 가장 옳았다, 그래서 우리는 따르기로 했다.' 어떻습니까? 지금 되돌아보면 그 대통령의 직감이라는 것에 대해…. "연정은 조금 그… 바로 내 전략이 보통은 옳았다라고 하는 자만심이 만들어낸 오류입니다. 내 딴엔 건곤일척의 카드라고 던졌는데, 그게 흑카드가 됐어요."
"내 전략이 보통은 옳았다는 자만심이 만들어낸 오류." 연정에 대해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내탓'을 분명히 한 것은 처음이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략적 실책"(한겨레, 6월13일)이라고 표현한 적은 있지만 그때는 '나의 자만심' 때문이라고 분명히 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수류탄을 (적을 향해) 던졌는데, 그게 우리 진영에서 터져버렸다"고 했다.
"나는 상대방이 상당히 난처해할 줄 알았어요, 상대방이. 내가 그때 내다본 것은 상대방이 상당히 난처해지고 내부에서 갑론을박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일사불란하고 우리쪽은 갑론을박이 돼 버렸어요(웃음). 거꾸로 총알이 그냥 우리한테 날라오고. 수류탄을 (적을 향해) 던졌는데 데굴데굴 굴러 와 가지고 막 우리 진영에서 터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이, 감당할 수가 없게 된 것이죠. 그래서 아주 뼈아프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수류탄은 함부로 던지지 말아야죠(웃음)."
"상의할 때는 아무 말도 없던 사람들이..."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2005년 9월 1일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저와 한나라당은 대통령의 연정 제안을 단호히 거부한다"며 연정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 이종호 박근혜
그렇다면 "아주 뼈아프게 생각"하는 이 대연정 시도 실책에 대해 노 대통령은 어느 정도 당쪽이나 참모들과 상의를 했을까?
"당 지도부하고는 얘기 다 해 놓았습니다."
- 정말 그랬나요? "당 지도부와 핵심 장관들하고는 다 의논했어요. 그중 몇몇은 참, 내가 다 얘기할 땐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침묵하고 있었는데…."
노 대통령은 자신의 연정 구상을 처음으로 여권 핵심부 인사들과 집단적으로 상의한 '11인 모임'(2005년 6월 24일)을 말하고 있었다.
- 그냥 지나가면서 얘기한 게 아니라 정식으로 모여 상의를 한 건가요? "모아놓고 얘길 했어요. 전략으로서 여러 가지 논의를 했는데 한 마디 말이 없이 가니까 뭐 내 마음대로 할 수밖에 없지요. 하라, 마라 말이 있어야 내가 뭐 어떻게 할 건데…. 하라는 말도 안 하고 안 하라 말도 안 하고 알아서 해라 이거지. 그래서 알아서 했지요(웃음). 듣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은 '난 별 의견이 없다' 이거거든. 그래 놓고 몇몇은 나중에야 '왜 너 알아서 했냐' 이래 된 거죠. 그 사람들 참…(웃음)."
그 11인모임 한 달 후, 언론(<연합뉴스> 2005년 7월 29일자)엔 이런 보도가 실렸다. "여권 유력주자인 정동영 통일부장관, 김근태 복지부장관은 노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안한 채 함구하고 있다."
어쨌든 대통령 스스로 "중요하게 상의한 사람들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보면 '충분한 협의'는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최종 결정은 청와대의 참모들과 상의해 대통령 본인이 직접 내렸다고 했다.
"그때 나는 (한나라당이 6월 27일 제출한 윤광웅) 국방부장관 불신임이 통과될 줄 알았어요. 그걸 전제로 분위기 잡는다고 연정 계획에 대한 페이퍼를 (긴히 상의할 이들에게) 돌려놨는데, 국방장관 해임건의안이 부결돼 버린거죠. 그럼 도로 거둬 들여야 될 거 아니오? 도로 이제 회수하고 연정 안한다로 가야 되는데… 참모들이 '도로 거둘까요? 이거 상황이 달라졌는데 도로 거둘까요?' 이랬는데, 내가 '어쩌면 좋겠나? 확 한 번 밀어볼까?’ 이러니까 ‘해 보시죠 뭐' 그래서…(웃음)."
노무현의 정치적 감각으로 "확 한 번 밀어본" 것이 결국은 패착이었다.
"나는 상대방이 상당히 당황할 거라고 봤어요. 당황하고 내부에서 갑론을박 하고 논쟁이 붙을 걸로 봤는데, 이 사람들이 아마 나한테 놀랬나봐요. 내가 던지는 건 무조건 받지 마라, 내가 던진 거는 처음에는 뭐 호박 같아도 나중에 그건 다 지뢰다, 이렇게 보는 모양이야."
역풍은 대단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선 '아니 누구하고 합당한다고?' 이래 나오잖아요. 사실은 연정과 합당은 전혀 다른 것인데, 그 당시에 연정과 합당을 같이 묶어버리더구만. 그때 (내가 전부터 상의해온 여권 핵심부) 몇몇이 그걸 수습해 줘야 되는데, 아무도 수습을 안해주더구만. 그래 아이구 벌써부터 몸조심이나 하고, 그렇게 생각했죠."
무엇보다 가장 큰 역풍은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지지자들의 신뢰에 큰 타격이 가해졌다는 점이다.
- 그때 <오마이뉴스>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이거 하라고 대통령 밀어준 게 아닌데”였습니다. 노대통령은 정치지도자가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신뢰의 기본이라고 했는데, 반한나라당 하고 싶어서 노무현 대통령 만들었더니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과의 정치적 차이가 없다’면서 한나라당하고 연정을 하자고 하니….
"바로 그런 점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시민 모두가 지도자가 되자', 이제 시민도 전략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시민이 연정과 합당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되고, 시민이 연정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정치학 교과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 대통령은 대연정 시도가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아무런 정치적 성과도 얻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나의 자만심이 부른 뼈아픈 패착"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 발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모순 아닌가?
"나한테 모순이 있는 건 아닙니다. 나는 대통령에 당선될 때부터, 민주당 시절부터 연정 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4년 총선은 반드시 우리가 질 걸로 봤습니다. 그 당시 민주당도 분열돼 있었고 궤멸 상태였기 때문에. 도저히 내가 그 당을 수습해갈 자신도 없었고, 또 그 당 가지고 우리가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2004년 총선 때 난 질 걸로 봤고, 그때 카드를 소위 일종의 이원집정에 가까운, 말하자면 내각제에 가까운 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총리를 국회 다수당이 맡고, 실질적 권력을 가져가고, 국군통수권 등 헌법상 부득이한 권력과 몇 가지 대외적 권력, 그리고 의전적 권력을 내가 행사하는 것으로, 그러면서 이제 타협의 정치를 한 번 해 보려고 한 것이죠."
▲ 노무현대통령이 지난 2005년 7월 2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연정관련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의 개혁을 피력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승렬 노무현 대통령
패배주의와 승부사적 기질의 이중주
이렇게 대통령이 "일찌감치 가지고 있었던 구상"은 노무현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될 때부터 정국주도 측면에서 자신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지자들은 '화끈하게 한번 해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을 때, 그는 "도저히 당을 수습해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2004년 총선에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내 한 몸 바쳐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보자'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 권력의 반을 내놓고 선거구제 개편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기존의 지역구도를 깰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중대선거구제와 비례대표 강화가 그 협상안이었다.
그런데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패배주의'를 지지자들이 거부해버렸다. 지지자들은 탄핵역풍을 만들어내면서 4·15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인 제1당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이겨 버리는 바람에, 아이 뭐 할 수가 없게… 할 수가 없게 됐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그러나 대연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004년 탄핵역풍 직후의 4·15총선으로 표면상 대통령과 의회 두 권력 모두를 장악했으면서도 자신감을 길게 가져가지 못했다. 2005년 재보선(4월 30일)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하고, 과반이 무너지자 한나라당과의 연정구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2004년 총선에서 이기니까, 연정을 할 수가 없게 돼 버리는 바람에 못 했는데, 그게 이제 1년 후 재보선에서 다시 역전이 됐죠. 그 전후로 독일의 슈뢰더 총리가 연정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게 부러웠습니다. 어떻든 한계에 봉착한 지도자는 다시 국민의 심판을 통해서 물러가든지 다시 권력을 회복하든지 그렇게 결판을 내야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정치냐,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그러던 참에 슈뢰더의 구상을 보고 우리도 이거 한 번 해 보자, 말하자면 걷지도 못하는 놈들끼리 우리 점프 한 번 해 보자 이래 된 거죠, 이제(웃음)."
결국 준비 안된, 무모한 그 점프는 실패했다. 노 대통령의 "뼈아픈 실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의 대연정 시도는 패배주의와 승부사적 기질이 동전의 양면처럼 합쳐진 것 같았다. 서로 다른 두 이질적 요소의 결합이 만들어낸 대도박, 그래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찍었던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시도를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 대통령은 2004년에 탄핵을 당하기 전부터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 너무나 버겁고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신임을 들고나오기도 했다.
"그 당시 심리적으로 내가 굉장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들한테 다시 신임을 묻지 않고 내가 대통령직을 계속 수임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너무나 버겁고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서, 하나의 정권에 의해서 역사가 크게 바뀌거나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정권이 한번 서고 한번 무너지는 이 과정이 굉장히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나는 이미 그때는 대통령으로서 거의 말하자면 힘이 다 빠져 버리고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판단했었어요. 그래서 재신임을 던진 것인데, 재신임도 되지도 않았고…."
▲ 지난 9월 2일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와 이한기 뉴스게릴라 본부장, 황방열 기자가 노무현 대통령을 인터뷰 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노무현 대통령
"내 정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도가 중요"
- 그런 상태의 대통령을 지지자들은 이해하지 못하지요. 얼마나 어렵게 만든 대통령인데 자꾸 힘들다고 하고, 왜 ‘아이고, 그만 해버릴까’ 하는지…. 대통령이라는 권력은 노무현 개인의 것이 아니고 지지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를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은 마음이 안 그렇겠지만, 내 처지에서는 내 정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역사라는 건 계기가 중요한 것이고 국가라는 것은 제도가 중요한 것인데, 내 정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봐서 통 크게 한번 하려고 하는 것이죠."
내 정권보다는 역사와 제도를 택했다! 노 대통령은 '큰 거 한 건'을 겨냥하고 있었다.
"물줄기를 그렇게 바꾸어 내는 그 하나가 5년 내내 갖고 두드려 맞아 가면서 주물러 쌓는 것보다는 기록상 확실하게 남습니다. 말하자면 역사의 한 매듭을 확실하게 바꾸려고 했습니다."
무엇이 노 대통령을 그렇게 다급하게 만들었을까? 그는 왜 지지자들의 마음을, 국민들의 마음을 차곡차곡 얻으려 하지 않았을까?
"오늘 5원어치 팔고 내일 10원어치 팔고, 물론 푼돈 모아도 중요하죠. 국가 운영이라는 건 10원도 벌고 20원도 벌고 뭐 50원도 벌고 티끌모아 태산이지만, 그러나 그건 내가 안 해도 그 정도는 끌고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한판의 승부'를 벌인 것이다.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선거구와 정권을 맞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출발할 때부터 환경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2004년도의 총선은 지게 돼 있다고 보고…. 여소야대 가지고 정국을 주도할 수 없기 때문에, 정권은 분명히 노무현 정권인데 속은 그게 안 돌아가는 정권이거든요. 이게 자동차 뚜껑은 벤츠인데 안에는 경운기 엔진이 들어가 있거든. 사람들은 보고 '벤츠 저게 뭐야, 두드려 부셔 버려' 딱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노 대통령은 너무 많은 것을 얻고자 했다. "역사의 한 매듭을 확실하게 짓고자"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 무엇에 동의하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대통령의 '지지자들과 충분히 상의하지 않는, 성급한 패배주의'였다.
그래서 국민은, 지지자들은 역사에 남을 '큰 승부 한판'을 벌이겠다고 나선 대통령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않았다. 이해 못한 것이 아니라, 이해를 거부한 것이다. 큰 권력(시민사회)이 작은 권력(대통령)의 성급한 성과주의에 '정신 차려' 한 것이다.
"청와대에서 고개 들고 나가고 싶어
검찰과 절대 손 잡지 않겠다고 작심"
[오연호리포트: 인물연구 노무현④] 권력분산, 자의냐 타의냐
권력분산. 왜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를 할까? 노무현 대통령은 참 이상한 대통령이었다. 정권을 잡았으면 권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검찰권력과 여당을 대하는 방식이 그랬다.
참여정부의 인사들은 이 권력분산을 권위주의의 해체라는 미명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노무현 지지자들은 궁금해했다. 특히 대통령 노무현이 "대통령 노릇하기 힘들다"고 말할 때는 더욱 그런 권력분산의 실체를 궁금해했다. 왜 있는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힘들다고 할까?
권력분산은 치밀한 설계에 의한 전략적 선택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약체 정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권력 담당자들이 휘하의 권력을 통제하지 못해 어쩔수 없이 선택한, 자의 반 타의 반인가? 그것은 인물연구 노무현의 중요한 대목이다.
"고개 들고 청와대 나가기 위해 검찰과 손 안 잡았다"
대통령 취임 후 며칠 되지 않은 2003년 3월 9일, 노 대통령이 평검사들과 '막가는' 대화를 했다. 전국에 TV로 생중계되고 있는데. 전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 취임 초기에 검찰하고 긴장 관계를 만들었는데요, 그건 어떤 설계에 의한 것이었습니까? "그건 작심하고 시작한 것이죠. 나는 절대로 검찰 신세를 안 지겠다고 작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검찰이 내 살림을 살아주면 자기도 또 뭘 누리는 게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청와대에서 걸어나오기 위해" 검찰과 거리를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검찰과 손 잡으면 청와대에서 걸어서 못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검찰이 내 손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나만이 아니고 내 주변 사람들이 전부다 방심을 하게 되고 그리고 어지간한 건 묻으려고 하고, 사고는 묻으면 묻을수록 크게 폭발하거든요, 다이너마이트하고 같아서. 그러니까 사고를 묻어놨다가 말년에 와서 크게 터트리는 것이 우려가 되기도 하고."
- 측근인 안희정씨가 대선자금 문제로 구속(2003년 12월 14일)될 때는 '대통령인 내가 검찰에 좀 손을 써서...' 하는 유혹을 느꼈을 법도 한데요. 그때 대통령도 참 힘이 없구나 생각했습니까?
"그때는 이미 검찰하고 내가 사이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이가 됐어요. 할 수가 없는 사이니까 그런 고민이 없었어요."
- 이러한 권력분산이 민주주의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질문을 할 때는 내심 그럴싸한 대통령의 분석을 기대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다시 "살아서 걸어나가기 위해"를 강조했다.
"무사하게 걸어 나가기 위한 전략이라고, 아주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웃음). 말하자면 내가 대통령을 무사하게 마치고 고개 들고 걸어 나가기 위한 전략이 그겁니다. 그런 분위기였으니까, 아직 분석을 다 해 보지 못했는데 공직사회의 긴장도나 정책의 품질이 높아졌다고 봅니다."
인터뷰 당시(9월 2일과 16일)는 검찰과 언론이 변양균-정윤재 사건을 막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을 때였다. 두 청와대 인사 관련 사건의 실체를 묻자 "나도 100% 알 수는 없다, 대통령이 전능은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노 대통령은 검찰관련 발언을 하면서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검찰하고는 절대 손잡지 않았습니다. 장악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손잡지 않는다는 거였죠. 검찰은 장악되는 데가 아닙니다. 검찰조직이 일사분란한 것도 아니고요."
대통령의 검찰권력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참 세상이 많이 변했다 싶었다. 대한민국 권력 1인자가 "검찰은 장악되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면 검찰에의 권력분산은 "작심한" 것도 있었지만 자의 반 타의 반 성격도 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3월 9일 오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배석시킨 가운데 전국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노무현 대통령
"당·정 분리는 자의 반, 타의 반"
그렇다면 이른바 당?정 분리, 여당에의 권력분산은 자의가 강했을까 타의가 강했을까?
- 노무현당으로 출발한 열린우리당이 여러 문제를 겪다가 결국은 해체됐는데요.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 혹시 안 하십니까? 당·정 분리가 아니라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당을 장악하고 했더라면 하는.
"장악이 안 되죠, 안 됩니다."
대통령은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려버렸다.
- 장악이 안된다... 그럼 당·정분리는 대통령 중심의 권력집중, 권위주의 해체라는 설계도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의 반, 타의 반인가요?
"자의 반, 타의 반입니다. 당?정 분리를 안 하고 내가 당권을 도로 장악해서 갈 수 있느냐, 그러면 내가 고민을 해 봤을 텐데 나는 안 된다고 판단했어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당·정 분리 원칙을 일관되게 주장했죠."
왜 장악할 수 없다고 보았을까? 노 대통령은 당이 장악되려면 우선 노선이 통일되어 있어야 하고, 공천권이라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밑천을 아무 것도 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정치인이 살려면, 동일한 정책적 가치를 갖고 그것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뭉쳐서 당을 만들고, 그 이유 때문에 지지하는 사람들이 지지 세력을 형성해서, 국회의원들이 그 당을 떠나면 살지 못하게 됐을 때, 그때는 이제 당·정 분리가 되더라도 그 안에서 이제 소위 이론을 가지고, 정책과 논리를 가지고 통제를 해 나갈 수 있죠.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그게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정치인은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지지 집단의 짜여진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 노무현 대통령이 노트북을 펴놓은 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컴퓨터에 '원칙이냐, 승리냐'라는 화두를 적어놓았다고 했다.
"사람들(국회의원 등 정치인)이 뭐 대의로 뭉친 것 같지만, 사실은 정치판에 딱 들어오고 나면 대의는 어디 가 버리고 정치적 입지만 남게 됩니다. 개인적 정치 기반과 입지, 이해관계만 남게 되어 있거든요. 대의라는 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각론으로 들어가면 다 희석되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을 함께 하는 정당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지지 집단, 지지 시민이 딱 짜여져 있지 않으면, 그러니까 당을 이탈했을 때 살아남지 못하는 문화가 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이탈이 생깁니다."
"컴퓨터에 '원칙이냐, 승리냐' 적어놓았다"
이런 인식 때문일까? 노 대통령은 임기 중에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냐고 묻자 "탄핵 당했을 때보다 (열린우리)당이 무너질 때가 더, 제일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컴퓨터에 '원칙이냐, 승리냐'라는 화두를 적어놓았다고 했다.
"원칙있는 승리가 첫 번째고, 그 다음이 원칙있는 패배, 그리고 최악이 원칙없는 패배다."
대통령은 왜 '원칙없는 승리'라는 가정을 하지 않았을까. 노무현 '정치 사전'에는 그러한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일까. 대통령은 '원칙'과 '승리'를 별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