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읽고 좋아했던 시중에 이풀잎 시가 있다.
오랫만에 다시 꺼내 봤는데,
비록 아주 깊이 있고 철학적인 시는 아니지만,
뛰어난 감수성으로 내 정신을 간지럽히는 언어들이 적혀있었다.
그 중에 한 편.
암담한 잿빛
우울한 거리 모퉁이에서
아이리스 세 송이를
샀어
차이코프스키의 연인이 되기엔
그 정도면
아주 충분하지
커피 한잔과
사과 한쪽으로
저녁을 마치고 나면
촛불은
키가 반쯤 줄고
비창도
싸늘히 식어가지만
Mr. 블랙
너를 잊겠다는 건
새빨간 거짓이었어
신문을 오려 붙인 듯
복잡한 표정으로
넌 잠시 머뭇거렸지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 뒤에
결국 남은 거라곤
되돌아온 편지처럼
허탈한 느낌뿐이었어
머물렀던 시간만큼만
그리우면 좋을텐데
참아야 했던 눈물만큼의
아픔을 간직할테지
레몬 향기 가득한
'카미유'는
슬픔이 놀랄만큼
씨끄러워서 맘에 들어
떠나는 너보다
붙잡지 못한
내가 더 미웠어
한참을 망설이다 끝내
뒤돌아 보고 말았지
넌 여전히 가로수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어
그런데
왜 네가 더
슬퍼보이니
그것에 위로 받을 만큼의
초라한 감각도
내겐 남아 있질 않아
유서처럼 갖고 싶은 건
너의 진실이지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빗방울이
풍금소리처럼 들릴 때면
난, 나뭇잎이 되고 싶어
날 담아 두기엔
네가 너무 작다던
너그러운 변명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었어
어색한 건
서로가 마찬가지겠지만
아무 일 없듯 웃으면서 떠나 줘
미안하다는 말
난 싫어
내가 너라면 먼저
벽난로에 불을 지피겠어
우리 사랑이
시베리아 처럼 춥잖아
이별에 알러지가 있으니
오펜하임도 괜찮겠지
암만 생각해 봐도
너의 아픔까지
감싸주고 싶었던 게
잘못이었어
어쩌면 오히려
더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걸
바보는 몰랐던거지
때늦은 후회에
가슴이 미어지고 있어
어두운 창가에
등불처럼 걸린 추억들이
거리마다 가득
나부끼는 이유를
이제야 할 것 같아
그리움은
노을처럼 번져가고
시든 장미꽃
낙엽되어 뒹굴어도
서툰 바램엔
한계가 있지
무작정의 기다림은
가망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대,
이젠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