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oR (BLOG)
유치찬란한 대화 모음집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필요한 여섯 가지 정진(精進)
일본의 다국적기업 교세라의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의 저서 '카르마 경영'에 나온 말입니다.
그의 경영철학은 아주 단순하고 정직한 원칙에서 부터 시작하더군요.
모든 것의 결정을 '이것이 인간적으로 옳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회장직을 사임하고 출가(!) 하셨다네요.
1. 누구에게도지지 않게 노력하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연구하고 노력하라. 또한 그것을 한결같이
지속하라.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겨를이 있으면 1센티라도 전진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라.
2.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겸손은 이익을 가져온다.”라는 중국 고전의 한 구절처럼 겸허한 마음이
행복을 부르면, 영혼을 정화시킨다.
3. 날마다 반성하라.
매일 매일 자신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점검하여, “자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나?” 등을 반성하고 경계하며
고치기 위해 노력하라.
4. 살아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라.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끼고 아무리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
5. 남을 위해 선행하라.
“적선하는 집에 경사가 있다.”고 했듯이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며,
남을 배려하는 말과 행동을 마음에 새기라. 선행을 쌓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보답이 있기 마련이다.
6. 감성적인 고민을 하지 말라.
항상 불평만 말하고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히거나 고민하지 말라.
그보다는 후회하지 않을 만큼 전심전력을 기울여 몰두하라.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보낸 시간의 보복
일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하루가 너무 빠르다고 느껴진다.
시간을 내어 해야지 마음 먹었던 일들이 어느새 한두주가 지나서 발견된다.
무엇인가를 할 만한 나만의 시간이 사라져 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요즘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게 시간이 사라진다.
하루가 그냥 가버리고, 그렇게 일주일이 없어진다.
올해가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3월이다.
무엇일까, 무언가 내가 시간관리를 잘못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네.
그리고, 나이가 들 수록 점점 시간이 빨라진다는 것 역시 사실일까.
또한 내 시간을 팔아 직장에서 돈을 받는다는 말 역시 사실인 것 같다.
이제 1년단위 계획은 너무 짧아 소용이 없어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 연단위 계획을 이젠 3년이나 5년단위로 세워야 할 듯 하다.
요즘 이렇게 넋놓고 있다간 금방 시간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제가 읽었던 시간관리와 자기계발 책들을 다시 되짚어 보지만,
막상 그렇게 쉽게쉽게 되지는 않는다는 걸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지는데요,
위대한 일들을 이뤄낸 사람들은 어떻게 그 24시간을 사용한 것일까요?
그분들의 부지런함이 새삼 대단해 보이는 Dreamy입니다.
아니, 신부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술기운이라고 하시지만,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신자를 일컬어 ㄱㅅㄲ라니요.
그것도 강론때 단지 주보를 본 것 뿐인 분들인데요.
말씀이 좀 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평신도이고, 영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신자일 뿐이지만,
그래도 머리속에 계속 말들이 맴돌아 마음속 얘기를 좀 넋두리 해볼까 합니다.
'신부님께서 특별히 뛰어나거나 내세울 것도 없으시다"는 겸양의 자세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라고 또 특별히 잘나거나 뛰어나지 않으니, 내말을 따라오는 것도 좋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셨네요. 또 "가톨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든지,
"교계제도 내에서 신도들은 (교계 제도상 하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제의 말을 따라야 한다"
(정확하게는 '똥을 집으라고해도 군소리 없이 집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을 쥐시며) 때리겠다" 라는 말도 곁들이며요.)
맞습니다. 저희는 당연히 본당 지도 사제를 존경하고 당신을 따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부님의 인성과 신앙, 영적 수행,
남들이 갈 수 없는 길을 기꺼이 선택하여 가신 것에 대한 존경,
예수님을 닮으시려 인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모범을 보이심에 대한 경외심,
신부님이 되시기까지의 10년이 넘는 고뇌와 수행의 시간들에 대한
존경심에서 당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제가 단지 교계제도(그러니까 교회의 그 지휘체계) 상에서 평신도 보다 위에 있으니까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씁입니다.
'내가 너보다 위니까 까라면 까라'는 ("까라면 까라"는 말씀도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카리스마 중에서도 가장 하위에 있는 조폭들이나 내세우는 권위입니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러한 이유로 사람을 움직이려하면
열에 아홉은 반감을 가질 것입니다. 특히 건전한 생각과 패기를 가진 청년이라면 당연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말씀하셨지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원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불의하지 않은 것일 뿐 사회제도와 상관 없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까라는 까'식의 협박은 사회 어디에나 있습니다.
"너 몇급이야!" - 그 '민주주의' 국가를 운용하는 국가기관에도 있구요,
"이러고도 월급받고 싶어!" - 돈으로 협박하는 회사에도 있습니다.
"니가 뭘알아? 내가 박사야!" - 지식의 상아탑에도 엄연히 있습니다.
"까라면 까"라는 군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요. (거기야 그렇다 칩시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국민 여러분은 제가 시키는 대로 그냥 하세요" - 모든 악덕 독재 정권은 항상 그렇습니다.
주먹으로 협박하고 목숨으로 장난치는 조폭 어르신들이 대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건 민주주의와 어쩌고를 논할 것이 아닙니다.
'정의'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사회제도와 상관 없이 '정의'가 있는 곳에는
강제와 강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딱히 신도에 대해 강제할만한 것이 없는 성당에서는 더할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이고 공염불입니다. 신자를 성당에서 내치시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냥 신부님을,
단지 '사제이기 때문에'가 아닌 '사제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십쇼.
덧붙여 교계제도 어쩌고 문제는, 사실 신부님께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전에도 두어번 들어봤었는데(모두 새 신부님이시긴 하셨습니다만),
도대체 이 내용을 신학교에서 '신자는 너의 어린양들이니 결국 무조건 니말을 따라야 한다' 식으로
가르치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몇번 듣다보니 이젠 제발 이것에 대한 올바른 적용도
함께 좀 익혔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다음, 그 ㄱㅅㄲ 문제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미사중에, 그것도 사제 강론중에 강론에 집중하지 않고 딴짓을 하다니요.
올바른 행동은 아닙니다. 그런데요,
사실 생각해 보면, 강론중에 아니 미사중에라도 주보를 보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미사전에 주보를 나누어 주겠습니까.
오히려 신부님의 강론이 주보보다 흥미롭지 못하다는, 주보한테 신부님 강론이 진거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들었던 강의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날 참석자 전원이 밤을 새다시피해서 정신이 없을 때였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기가 미국에 MBA 과정을 들을때 있었던 일이다.
강의 마치고 다들 골프치고 여가를 즐기느라 학생들(MBA니 지긋하신 분들이 많으셨을 겁니다.)이
강의 중에 많이들 졸았다. 강의를 하시다가 보다 못한 교수가 제일 앞에서 자고 있는 학생의 옆에 앉아있는 분에게
'좀 깨우라'고 말을 했답니다.
그러니까 그 학생이 '왜 나한테 그러느냐? 재운 사람이 깨우라." 라고 대답을 했다네요.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조는 것은 여러분들 잘못이 아니다. 모두 내 잘못이다. It's not your fault. It's all my fault.'
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강의를 졸지 않고 끝까지 아주 잘 들었습니다.
왜 신자들이 신부님의 강론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신부님께서 화를 내십니까?
그것이 버릇이 못돼먹은 신자들만의 탓일까요?
가끔 저도 신부님들의 대중연설 능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일기 써온 것을 그냥 죽~ 읽으시는 수준의 분들이 계서서 안타까울때가 있습니다.
비슷한 종교의 어떤 분은 40만의 신도 앞에서 설교를 하지만 그 40만 대부분이 그 말씀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않으려 하기도 합니다. 만약 신부님이 아니라 주교님이나 루터킹 같은 분이 강론대에 서 있었다면
주보를 펴는 사람이 많았을까요, 적었을까요.
게다가 자신의 뜻과 맞지않는 신자를 가리켜 ㄱㅅㄲ라니요.
아무리 술기운이시라지만, 지도자의 지위에 있으신 분께서 아무 생각없이 하시는 말들에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을 수 있고 잘못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생각해도 이런데,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혹시나 가시나무속에서 어렵게 싹튼 그 사람의 신앙을 뿌리채 뽑아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신부님 얼굴 뵐때마다 자꾸 생각나고 머리속에 아른거려서,
한번 끄적여 봤습니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나는 기형도의 글이 좋다.
어지러운 감성을 건드리는 그의 풍부한 어휘들과,
건조한 듯 어두운 회색빛 나는 글의 분위기,
글을 읽고 있지만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묘사와 비유들.
지금도 가끔 여유를 느끼고 싶을때면 그의 전집을 꺼내서
하나씩 읽어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표현과 언어,
그 속에 하나씩 나타나는 주제들에 놀라곤 한다.
그런 글을 써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오컴의 면도날과 브레너의 빗자루
1. 오컴의 면도날 Ockham's razor
윌리엄 오브 오컴 Wiliiam of Ockham(대략 1285~1349) 은 영국의 백작령 서리 Surrey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규명하는데 평생을 바쳤다고 하는군요.
이 중세시대의 수도자는 이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논쟁들 속에서 무의미한 진술들을 제외해야 겠다고
마음먹고, 1324년의 어느날 그의 저서에 등장하는 대로
"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cesitate. "
" Frustra fit per plura quod potest fieri per pauciora. "
보다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
의 말로 오컴의 면도날 Ockham's razor 을 도입해 무의미한 진술들을 토론에서 배제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흔히 '경제성의 원리 Principle of economy' 라고도 불려지는 이것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을 잘라내 버린다는 비유이며,
필연성이 없는 개념을 배제하려 하는 '사고절약의 원리 Principle of Parsimony'라고도 불립니다.
오컴의 면도날이 의미있는 것은 현대의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기본 지침이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설이나 이론을 세울때, 또는 그것을 토론할 때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른 가설이 있다면 가정이 더 많은 쪽을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생활속 토론이나 자신의 사고를 정립할 때도 효과적이겠지요.
2. 브레너의 빗자루 Brenner's Broom
오컴의 면도날에 정반대되는 도구가 바로 브레너의 빗자루입니다.
시드니 브레너 Sidney Brenner 는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영국의 분자유전학자입니다.
당시 신생학문이었던 분자유전학을 연구하며, 그와같은 새로 생겨난 학문이 기존 학문분야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기위해서는
과감해져야한다고 말하며 이 빗자루를 만듧니다.
그는 우선 새로운 가설이나 발견, 새로운 아이디어가 당장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탁월한 아이디어와 명쾌한 통찰력을 믿고 우선 그것을 용감하게 발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내용은 브레너의 빗자루로 양탄자 밑으로 쓸어넣으면 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여전히 양탄자 위에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지, 그럴 마음이 계속 드는지를 검토하라는 것이죠.
(에른스트 페터 피셔 '슈뢰딩거의 고양이' 에서 일부 발췌)
3.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문제로 토론을 벌이거나, 발생한 현상의 문제를 찾을 때 오컴의 면도날은 효과적인 가이드를 제시합니다.
여러 가능성중에서 가장 '~~한 상황이라면'이라는 가정이 많이 들어간 생각을 잘라내버리면 되는 것이죠.
수많은 가능성과 가설 속에서 헤매일 것 없이 그것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며 오컴의 면도날을 빌려 하나씩 잘라나가는 것이죠.
실제로 오컴은 신에게까지 자신의 면도날을 들이 밀었다고 하는군요.
(정확하게는 신의 존재에 대한 가설들에 대해서요. 어차피 신의 존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네요.)
하지만 우리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식의 프론티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골몰하고 있다면,
오컴의 면도날은 잠시 도구함에 포개두고 브레너의 빗자루를 꺼내는 것이 좋겠네요.
어쩌면 지식이나 통찰은 갑자기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서 그 뒤에오는 세부사항에 대한 증명이 없다거나,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양탄자 밑에 착착 쓸어서 넣어두고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도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컴의 면도날, 브레너의 빗자루, 둘 다 모두 재미있는 비유를 가진 흥미로운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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